목록。.....시집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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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잘가라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가라 소리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가라 ..시*도종환

*햇살의 분별력 감나무 잎새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하고요 장닭 벼슬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벼슬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차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가 가고요 ..시*안도현

*사랑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가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간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시*김상미

*피크닉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이므로 있을 때 이 세상 곳곳 소요하다 가거라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만져지는 거 냄새나는 거 어찌하여 번개오색나비는 퍼렇게 번개치는 날개로 개마고원을 날아가는지 어째서 아름다운 복사꽃 뒤쪽은 삶의 유혹인지 ..시*황지우